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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광해군'에 대한 오해와 굴육의 왕 '인조' 4 2010.02.15

.. '광해군'에 대한 오해와 굴육의 왕 '인조'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은 순전히 단종에 대한 궁금증으로 잡게 되었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
즉, 세조로부터 단종은 왕위를 빼앗기고, 서인으로 전락된 뒤 유배지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서 살해됐다.
단종 복위운동을 했던 신하들중에선 '사육신'과 대칭되는 '생육신'이 있으나
단종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될쯤 오해와 역사에 굴욕을 남긴 광해군과 인조에 관심이 쏠렸다. 


광해군은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면분론자들이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한 것으로
오히려 광해군은 대명 사대주의자들에 밀려 
실리적 외교론과 현실에 바탕을 둔 정치이론을 펼치지 못한 불행한 왕
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이란 무엇인가?
인조반정의 명분은 두가지다.

명에 대한 의리를 버리고 대명사대를 하지 않은 것과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형제를 죽인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인데,
당시 명은 기울고 청이 일어서고 있는 시점에서 광해군 - 광해군은 세자책봉과정에서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한 명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다 - 은 중립 외교 노선을 걸었는데, 대명 사대주의자들에겐 그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의 정치사를 볼때 성군 내지 명군으로 불리어지는 왕들 역시 자신의 세력 제거에는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태종과 세조다. 이들의 행적에 비하면 광해군은 극악스럽다 할 수 없다.
즉, 인조반정을 주도한 인물들은 명분보다 사대주의 내지는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인조반정을 중종반정과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는데, 그것은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연산군이 철저한 폭군이었던 것에 비해
광해군은 일부 사대주의자들과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현실적인 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종은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은 경우지만 인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반정을 주도했다.
중종반정이라고 일컫는 사건이 연산군 폐출사건이었다면 인조반정은 반정이자 역모였다 할 수 있다.




인조반종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에 오른 '인조'
인조(선조의 다섯째 아들)는 이괄의 난 이후 정묘호란, 병자호란등을 겪고,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굴육마저 겪게된다. 이는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것이 근본적인 원인으로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게 패할때까지 이 관계는 계속된다.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에 비해 낯선 '이괄의 난'은 당시 계파간의 갈등이 빚어낸 것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른지 1년이 되지 않았을때 도성까지 버리고 피난길에 오를 만큼 큰 타격을 입혔다. 이 사건으로 나라는 파탄지경에 이르러 결국 삼전도의 치욕으로 이어진다.

병자호란 볼모였다 9년만에 돌아온 소현세자는 입국 두달후 병을 얻고, 와병 3일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이때 그의 온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기록에 의거 인조가 소현세자를 살해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소현세자가 죽은 이듬해 인조로부터 세자빈은 사사되고, 제주도로 귀양간 세아들중 두아들은 병에 걸려 죽었다.
- 현재 방영중인 KBS 드라마 '추노'의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다 -

그렇다면 인조는 장자인 소현세자를 왜 죽였을까? 
지나치게 대명사대주의를 펼친 인조는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친정주의 보이자 불신하게 되었고,  후궁 조소용의 이간질에 말려 아들을 독살하게 된다. 이로 인해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이 세자가 됨으로서 현종 대의 서인과 남인 사이에 치열한 정쟁으로 비화된 '예송논쟁'의 원인을 제공하기 까지 한다.
- 예송논쟁은 얼마전 '골든벨'에서 출제되기도 했다. -


인조반정이 실패했다면 혹은 이괄의 난이 3일천하로 끝나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굴육의 왕 '인조'로 인한 정묘, 병자호란은 발생하지 않았을 뿐더러 삼전도의 치욕도 없었으며,
새로운 문물을 보다 빨리 받아들여 시대적인 흐름에 현명하게 대처함으로서
구한말 치욕의 일제강점기도 가능치 않았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기에 '광해군'을 폭군으로 인조반정을 역모라 못하지만
왜곡된 사실에 반감과 비정한 역사앞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두니 곳곳에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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